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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기타 (Culture & Others )

Mandela 전시회 그리고 나찌 헌터 Wiesenthal 이야기.

by 샘터0 2019. 11. 10.
11월 7일 목요일.

오늘은 내남자와 넬슨만델라 전시회에 갔다. 넬슨 만델라라는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인권운동가, 사우스 아프리카의 대통령..넬슨 만델라를 이야기하면 한국인으로서는 김대중 전대통령이 떠오른다. 김대중 전대통령도 장기집권 독재 박정희 대통령( 1962년 대통령직 권한대행으로 시작해서 1979년 10월26일 사망 ) 정권아래에서 인권운동으로 정치적 탄압을 받다가, 나중에 국민의 선택으로 대통령이 되었던 분이 자연스럽게 생각난다. 그래서 만델라전시회의 내용들을 읽어보면서, 얼마나 지독한 상황이었을지가 가슴으로 느껴진다.


사우스 아프리카는 백인우월주의자들이 사우스 아프리카의 정권을 잡으면서부터 모든법을 백인우선으로 바꾸고, 국민들인 흑인들을 차별화시키는 법을 만들어 통제하던 나라이다. 9%의 백인이 92%의 국민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는것을 법제화 시킨나라이다. 마치 북한에서 주민들을 통제하는것과 유사한방식이기도 하다. 이동할때마다 패스북이라는것을 가지고 다니고 검열을 받아야하는 사회..그런식으로 국민의 움직임을 통제한 나라. 무엇보다 백인용과 비백인용으로 화장실, 버스정거장, 해수욕장...모든것이 구분되어있는 나라..그런것들이 상당히 충격적이다. 그런 일상생활에서 발걸음을 딛을때마다 백인과 비백인이 구분되어있다는것..


나도 독재자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태어나서, 자랐던 세대이다. 그래서 국민학교때 학교에서 새마을운동도 하고, 보리혼식 도시락을 지참했어야했고, 페품수집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는 선거가 되면 동네 통반장들이 주민들에게 식사를 풀어서 대접하고, 박정희 대통령을 투표하도록 불법선거운동을 조직적으로 해왔던 기억도 난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때 아침에 학교에 등교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라는 가까운 주변인물의 총격으로 사망했다는 뉴스가 하루종일 라디오로 흘러나왔었다. 그당시는 늘 나보다 형님,누님인 세대의 대학생들이 날마다 데모를 했었고, 나는 대학생들이 공부를 않하고 데모를 해야한다는 사실을 잘 몰랐었고, 그당시는 대부분 가난하고 굶주린 세대들이라, 먹고사는것이 중요한 시대였는데...그래서 부모들을 데모하는 대학생들을 못된놈들이라고 욕하게 만드는 방송매체였다. 어쨌든, 나의 세대는 운동권학생과 보통학생사이에서 고민하며 우왕좌왕하는 청춘의 시절이었던것같다. 운동권 학생들은 순수했던것일게다. 그리고 그들의 열정을 불사르는 지식인들이었을것이다. 나도 그런고민을 않한것은 아니지만, 나는 가난한 현실을 벗어나고 좋은직장이나 얻어서 취업하는것이라고 내 미래를 생각했던 보통학생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캠퍼스는 늘 최루탄 가스를 일상적으로 만나게되었고, 그래서 운동권학생들을 지지는 하지만, 때로는 그런불편함을 탓하기도 했던것같기도 하다. 어쨌든, 나는 그런시대를 격으면서 내가 알지못했던 운동권 학생들의 

많은 고통을 만델라전을 통해서 되새겨보게 된다. 한국의 수많은 인권운동을 했었던 순수한 인권운동학생들과 사회적으로 저항세력을 결집해서 인권운동을 해왔던 사람들,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사람들이 그 시대를 저항하면서 ,박정희 정권후에 들어선 군정권에게  국민의 주권인 직접선거권을 얻어냈다. 그것을 기반으로해서 국민들이 직접선출한 민간인 14대 김영삼태통령이 탄생하게 된 1993년 2월 ...그것이 한국의 민주화의 시작접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운동권학생들은 무척이나 외로운 인생을 일찍 시작했을것이다. 뜨거운 가습으로 사회를 바꾸려는 대의를 품고 작은 희생도 마다하지않는 개인적인 투쟁이 사회안에서 외롭게 진행했었을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젊은 청춘들이 세상에 이름을 알려지지도 않은채, 소식도 없이 독재 군정권아래에서 사라져갔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을 생각하면서 보게되는 이 전시회는 이제야 나도 그들의 생각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는것같다.


남아프리카는 한국의 독재상황보다 훨씬 심각한 인권상황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커다란 권력에 저항하며 세계에 남아프리카의 인권을 알리고 도움을 구하는 활동으로 국내에서의 한계점을 타계해 나간것은 국내상황에서의 인권운동의 한계를 넘어서게 만드는 커다란 키로 작용한듯하다.

한국에서는 그당시에 외국으로 마음대로 나갈수가 없도록 만들어진 시스템이라서 세계에 한국의 인권상황을알리는데 무척이나 어려웠을것이다. 운동권학생으로 활동하다가 정부의 감시가 심해지자 외국으로 탈출한 사례가 있다고는 하는데, 그것은 굉장히 특별한 케이스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지금의 글로벌 사회와는 아주다른 국제 환경이라서 한국의 운동권학생들이 국내상황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을것이다.


전시회가 열리는 같은 건물에서 저녁에 나찌헌터Wiesenthal 에대한 연극대본을 쓰고, 직접 연기를 하는연극이 상영된다고해서 내남자가 관심있어해서 같이갔다. 나로서는 이 연극이 생각보다 내용이 별로 없었다는 생각이다. 이사람은 이스라엘에 사무실을 두고, 나찌로 활동했던 사람들을 추적해서 미국이나 오스트리아 법정에 세우는사람이다. 그런데 오스트리아법정에서는 미적대는 상황이 많고, 미국에서는 법정판결이 잘돼는 편이라고 한다. 이사람은 나찌전범으로 활동했던 사람의 오랜주소를 추적하거나 그들이 버린 처방약에서정보를얻거나 해서, 그들의 전범당시 행동을 증언해줄 사람을 찾아낸다음에 법정에 세우는 역활을한다는..































Simon Wiesenthal devoted six decades of his life to hunting Nazis, bringing 1,100 war criminals to justice, including Adolf Eichma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