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처음오시는분들께 ( For First visitors )

샘터의 인생여정 이야기.

by 샘터0 2013. 11. 12.

내 자신의 경험과 살아온여정에 대해서 이곳의 어느글속에 포함된내용으로 나와있을것입니다.. 그런데 가끔씩 사람들이 물어보는 경우가 있어서 그냥 이곳에 전체적인내용을 참고로 올려놓으려고 합니다. 

 

이제 50살의 나이가 되었으니 제법 인생을 산것같은 나이라고 생각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그런느낌은 제 스스로 들지 않습니다. 지금시점에서 내 인생을 생각해보면, 카나다로 이민을 결정한것이 가장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샘터의 인생이야기 시작합니다.

 

제가 태어나서 어린시절 5살정도까지는 대구근처의 지방에서 자랐습니다. 전형적인 농촌의 작은도시입니다.그당시의 어린기억에서도 아버지가 술마시고 들어와 주정하는날은 우리 형제들은 마굿간으로 대피해서 지냈던생각이 납니다. 서울에 정착한것은 초등학교 일학년 겨울방학즈음이었습니다. 그후로는 서울에서 자랐습니다. 초등학교는 그저 평범한 아이였습니다. 성정체성을 고민한적도 없고 얌전하게 지내는 학생…동네에서 친구들과 딱지치기도하고, 말타기도하고, 구슬치기도하고…한가지 다른점이 있었다면, 가끔 누나들하고도 놀아줍니다. 어린시절 주로 두누나들과 자란시간이 많아서 두누나들이 고무줄 놀이할때 줄잡아줄 사람 없으니까 나를 고무줄 놀이에 끼워넣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고무줄놀이가…가끔씩 누나들이 친구들과 놀때 사람이 모자라면 끼워서 같이 놀았습니다. 

 

중학교시절…보통은 사춘기가 시작되는 남자들만의 학교시절이지요.저는 성적인면에는 보통친구들보다 늦었던것같아요. 학교에서도 말없이 조용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학생일뿐이지 특별난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영어수업시간이었나요.. 선생님이 무슨질문을 했는데, 제가 아니라고 대답했는데 그 목소리가 좀 여성스러웠나요 ? 그 영어선생님이 내별명을 "미스박" 으로 지어버린겁니다. 그후로 같은반친구들이 그별명을 주로불러서 좀 챙피했습니다. 선생님들중에 국사 선생님이 계신데, 그분은 수업을 학생들이 번호순으로 돌아가면서 다음에 공부할단원을 발표하는식으로 진행합니다. 그래서 학생들 대부분,,학습참고서 내용을 베껴와서 칠판에 적어놓습니다. 학생들이 그러는동안 선생님이 지난번 배웠던 내용을 질문을 하는데..답을 맟추지 못하면, 그 선생님은 학생들 고추를 만집니다. 불행하게도 제가 그별명 때문에, 이선생님의 질문타겟이 되어서 매번 저에게 반드시 질문을 하십니다. 그래서 국사수업시간전 쉬는시간에는 지난번에 배운것을 공부해야 했습니다. 지금생각하면 그 선생님도 게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중학교 3학년..주로 학교 도서관에 가방던져놓고 운동장에서 찜뽕공으로 놀다가, 도서관에서 공부좀 하는척하다가 집에가는생활이었죠…집에서는 늦게까지 공부열심히 하는줄알고 좋아들 하시죠..그중에 제 짝꿍놈이 약간 이쁘장하게 생겼습니다. 그넘이 자기는 같은반에 키큰넘과 같이 뒷동산에서 같이 누가 멀리싸나 그것도 하고, 뽀뽀도했다고 그러더군요. 그당시 나는 모 그런면에는 좀 둔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말았습니다. 학교운동장에서 놀다가 고등학교형들이 지나가면서 이쁘장한 내 짝꿍을 불러서 모라고 그러면서 이쁘다고 볼에  뽀뽀를 하더라구요. 저는 옆에 있다가 얼떨결에 그형들이 할수없이 해주고 갔었죠..근데 모 그게 몬지 몰랐죠..이 시기에 자위행위에 대해 대충 친구들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남자선생님을 혼자 좋아하기 시작했었죠...

 

고등학교시절은 제에게 많은변화가 있었던 시절인것같습니다. 그당시에 인기가 있었던 공업고등학교를 갔습니다. 원래 제성격은 상업고등학교가 적성인데, 그 주산을 튕기는게 싫어서 공업고등학교로 선택했다는..학교에서 공부한다기보다는 거의 매일 놀러다니는 느낌으로 다녔습니다. 본격적으로 자위행위에 대해 친구들과 이야기하기 시작했죠.. 다른친구들은 플레이보이 잡지나 여자나체 사진을 몰래 보느라고 바뻤지만, 저는 여자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어서, 그 친구넘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이 학교에서 제 성격도 같은반 애들과 같이 어울리는 성격으로 바꾸어주었고,내가 그림을 그리는것을 좋아했는데, 미술선생님이 제 그림을 보더니 소질이 있다고 말씀해주셨고, 책을 읽고는 수필같은 글을 쓰기 시작했엇고…좋은글들의 맛을 느끼기 시작했었고,,, 시를 쓰기 시작했었고…. 나름대로는 내인생에 대한 방향을 내다보기 시작했습니다.학교에서도 같은반애들에게 개그맨같은 웃기는 넘으로 알려기지도 하는,,, 중학교와는 완전히 다른사람으로 지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겨울즈음에 다리가 갑자기 아파서 걷지 못할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즈음부터 병원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는데…병명을 알수없는…성장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만합니다. 그후로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었는데, 이약의 반대효과로 관절의 연골부분이 망가졌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시기가 저에게는 암흑시기중 하나였습니다. 병원을다니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한후에는 책이나 읽으면서 병원을 지속적으로 다녔는데, 별다른 차도도없고 병명도 모르고,,관절은 망가졌고…  

 

이정도에서 제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약간은 나와야 할것같군요. 저는 3남2녀중의 막내입니다. 그런데 주로 두누님들과 자랐고 나이든 두형들은 제가 어릴때 외가댁에서 주로 자란듯합니다. 아버지의 직업이 그당시 경부고속도로를 공사하는 회사에서 일하는관계로 수시로 이동을하는 상황이라서 그런듯합니다. 그런데 가장큰문제는 아버지가 술중독이었고, 술마시고 집에들어오면 폭행을 일삼았고, 그 희생자는 어머님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한이후로는 주로 독립해서 살았고, 지금까지도 아버지라는 사람을 혐오하고 싫어합니다. 어머님은 지난 2005년에 돌아가셨지만, 용서할수없는 아버지에대한 분노와 애증은 여전합니다.

 

어쩄든, 어느날 엘빈 토플러가 쓴, 제 3의물결 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 책이 제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책을 읽고난후에는 컴퓨터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책속에서 예견한 미래의 사회가 지금 실사회에 이루어졌거나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대단한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산공부를 해서, 학교에서 추춴해주는 직장에 입사시험을 거쳐서 직장을 잡았습니다, 신용카드회사에 입사했는데, 그당시는 신용카드가 한국에서는 초반기에 해당해서 사실 저도 신용카드회사가 뭔지 잘 몰라서 아는친척형들한테 의견을 물어보고는 입사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약 10년정도를 그회사에 다녔죠.. 

 

이정도에서 저의 게이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야 할것같군요. 사실 고등학교 졸업한이후까지도 게이가 있는줄도 몰랐습니다. 고등학교친구로부터 게이나 호모라는 이야기를 들은적은 있지만, 그래도 그게 무언지는 몰랐습니다. 다만 내가 아는 사실은 내가 남자 신사복을 입은 사람들을 무지 좋아하고 여자들에게는 관심이 없다는것입니다. 

 

제가 직장을 생활을 시작했을당시에 회사가 서울시내 중심도심에 금융기관빌딩이 많은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당시에 점심을 먹고는 은행에 들러서 은행내에 비치된 잡지를 뒤적이는것도 그냥 일상적인 일입니다. 그중에 "선데이 서울" 이라는 잡지에 게이의 수기가 실린적이 있습니다. 그기사에서 P 극장에 게이들이 주로 모여들고 그곳 화장실에서 사람들이 행각을 벌인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당시는 피카디리 극장이라고만 생각했는데,,,그곳에서는 전혀 그런분위기는 아니라는걸 영화보러 가본적이 많아서 알죠 아무튼, 직장생활시작한지 이년정도즈음 되었을때인가.. 토요일은 오후1시에 일이 끝나는날이라 퇴근후에 친한 일반친구를 종로에서 만나기로했는데, 이 친구가 일하는곳이 외곽입니다. 그리고 이친구는 오후3시에 일이 끝나서, 특별히 갈곳은 없는데 시간이 애매하게 남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일하느라 피곤한데 어디들어가서 낮잠이나 잘까 생각하며 파고다공원을 지낙가고 있었는데그때마침 그 파고다 극장 동시상영하는 영화관이 눈에 들어와서 그냥 그곳에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서 구석자리에 앉아서 영화가 시작하기를 기다리는데..좀 이상하져..사람들이 자리에 앉지않고 저렇게 벽에 기대서 서있는게.. 남는자리도 많은데 아무튼 그때는 그리 모 심각하게 생각한건 아니고.. 상영하는 영화도 이미본것이고 그래서…영화가 시작할즈음에 그냥 눈을감고 의자에 팔을 기대고 졸음이나 잘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서 영화가 상영되는도중에 잠을 청하려고 노력하는중인데, 누군가 손으로 내 무릎을 건드리는것을 느꼈습니다. 그래도 처음에는 설마…하고 의심을 했는데..가만히 있어보니까 다시 만지는것입니다. 그래서 깜짝 놀래서 어쩔줄을 모르겠더라구요.. 이거 상상밖의 일이 벌어지는것같아서..그래서 않되겠다 싶어서, 영화가 상영되는중에 벌떡 자리를 일어나서 조급하게 극장을 나왔습니다. 예상치못했던일을 처음으로 당한대다가 남자어른의 손이 나를 만진것이 한편으로는 좀 챙피하기도 했죠..그래서 극장을 헐레벌떡나와서는 호흡을 좀 진정시키면서 이제는 안심이라는 생각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데…뒤에서 누가 나한테 말을 거는겁니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니..아까 그아저씨가 나를 따라 나와서는 커피를 한잔 하자고 그러는겁니다. 나는 어쩌나 싶은생각이기도했지만, 커피숍은 공공장소인데 거기서 커피한잔 마신다고 뭔일 나지는 않겠지….라는 생각과… 호기심이 생기는것입니다. 예전에 들었던 그 게이들의 극장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생각이 불현듯 떠 오르고…그래서 갑자기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커피샵에 들어가서 커피를 마시는데 그 아저씨가 자기는 일본어 강사인데 젊은친구들을 좋아한다고 시간있으면 다시 만나보고 싶다는겁니다. 그래서 나는 친구를 만나러 가야한다고 그러고는 헤어졌습니다, 

 

그러고는 친구를 만나고 밤늦게 집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머릿속은 온통 그장소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주말만되면 파고다 극장에가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나 지켜보기를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주기적으로 오는 사람들의 얼굴도 어느정도 알게되고…더러는 사람들을 만나서 커피를 마시기도하고.. 근처 여관에 들어가서 같이 지내보기도 하고 그랫습니다. 그래도 아직 게이섹스가 무언지는 잘 모르고 그냥 사람들을 지켜보고 만나보면서 게이라는것이 어떤것인지 관찰하자는 의도였는데…6개월정도가 지나고 보니 내가 그안에 들어가있는것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누구에겐가 말이라도 할수있으면 좋을텐데..아무도 없었습니다.. 내가 게이 친구가 있는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게이가 몬지도 모르는 보통사람들한테도 이야기할수도 없고…날마다 나혼자만의 생각과 판단으로 게이라는것을 알아가야하는것입니다. 여러가지 생각들이 교차했습니다.사회에서 대접을 밥을수도 없는 게이…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할 게이…그걸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건지..

그래서 절망해서 죽고싶기도 했습니다..그냥 인생을 포기하고 사는게 낮겠다 싶기도했습니다. 그렇다고해도 나는 내가 게이라는것을 부정하고싶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게이가 무슨뜻인지를 알게 되었고...또한 내자신이 게이라는것을 이제 분명하게 알았고, 그래서 나는 게이로 사는것이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나는 평소에도 사랑하지않는 사람과 결혼하거나 사랑하는 가족인척하는 내 부모님들 세대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을 내 부모님의 인생을 보면서 늘 마음속에 다져왔던 생각들입니다.

 

그렇게 혼자서 온갖 고민을 2년동안을 하고는 나는 스스로 게이라는것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의미는 나는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미워하지않고, 내스스로를 게이로서 사랑하면서 살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던중에 극장에서 하이텔 통신모임 "또하나의 사랑" 에서 소식지를 무료로 나누어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것을 기회로 나도 하이텔에 접속해서 "또 하나의 사랑" 이라는 모임에 가입을했습니다. 그동안은 친구도없이 홀로 게이로 서성거렸다면, 이제는 하이텔모임을통해서 비슷한 연령의 친구들도 만들고, 하이텔모임에서 게이에 대한 편견이 아닌, 긍정적이고 논리적인 자료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게이로 사는것에 대해 긍정적인 목표를 세우게 만들었고, 나의 인생을 더이상 부정적인내용으로 허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알게되었습니다. 하이텔 모임의 소식지와 그친구들을 만나서 게이로서 사는것에 대한 긍정적인 신호를 잡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여러가지 경험들을 바탕으로해서 나는 게이로 살겠다는 생각을 변함없이 유지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실생활이 한국에서 그리 게이로 살기에는 만족스러운것이 아닙니다. 게이로서 파트너를 찾는것도 쉽지않고,,더구나 내가 좋아하는 나보다 나이든 게이들을 만나도…게이로서의 정체성이 서있고, 삶의 목표도 설정이 되어있는 그런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대부분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는 커밍아웃이 되지 않은상태에다가, 사소한 말다툼이나 의견충돌만으로도 쉽게 마음을 접어버리고 돌아서버리면 되는 아주 쉬운관계밖에 되지못하는게 현실이었습니다. 그안에서는 게이들의 현실을 이용해서 등쳐먹는 사기꾼으로 살아가는사람에게도 당하고, 협박해서 돈을 갈취하는사람들에게도 당한적 있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당시에는 특별한 법적인 보호장치가 없는 상황이라서 법적보호를 기대하기가 어려웠는데,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을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이텔모임에서 게이친구들을 만들고나니, 나와 같은고민을 하면서 같은위치에서 살아가는 친구가 있어서 얼마나좋던지..서로 게이라는것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며 끼를 떨기도하고 그런점들이 너무나 편안하게 해주었습니다. 특히 나로서는 술을 마시지 않아서 종로 게이바를 갈기회가 거의 없었는데이제는 친구들 따라서 가면 되고.... 하기는 나는 이태원에 댄스바나 드랙쇼바를 가는것을 좋아하지 종로 게이바에서 술마시며 노래방 마이크잡고 노는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하이텔모임을 통해서 나는 게이로서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할수있는 동력이 되어주었고, 게이로서의 내인생을 그려볼수있는 시야를 갖게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하이텔 모임에서 많은 사람들을 알게되었습니다. 그중에 게이인권운동의 선두에 서서 활동하는 젊은친구들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들자신의 인생을 희생해가면서 인권운동의 앞자리에 얼굴을 내미는 그들에게 뒤에서 격려하고 박수쳐주는것으로 만족하고 말았지만, 그들이 내 인생을 열어주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고있고,지금도 그들에게 감사하다는 생각을 멈출수는 없습니다.

그들에게 일일이 말을하지는 못하지만, 늘 감사하는마음을 갖고있습니다. 그들이 나서지 않았다면 한국에서 "게이"라는 존재가 알려지지도 않았을것입니다. 초기에 통신상의 토론장에서 막말로 쓰레기같은 언어를 쏟아붓는 일반들앞에서도 의연하게 게이의존재를 올바르게 알리고, 게이인권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고 지금도 열정을 쏟아붓고있는 그들에게 마음의 박수를 보냅니다.

 

한국에서 게이로 사는것이 어려운 이유중 하나는 파트너같은 사람들을 만나기 어려운것도 있지만, 성적인 욕구를 해소할 방법이 많지않습니다. 그래서 가끔씩 게이 찜질방을 이용했습니다. 물론 그곳에서는 여러가지 섹스가 벌어지지만, 안전한 섹스는 스스로 챙겨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사실 별로 섹스다운 섹스를 해본적이 없습니다. 거의 오랄수준이지 애널섹스를 거의 하지를 않았습니다. 기본적으로 에이즈에 대한 염려가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애널섹스에 집착할만큼 나의 섹스셍활이 활성화되지는 않았습니다. 애널섹스를 거의 하지 않았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긴 했는데…그런사람 거의 만나기 힘들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의 나의 장벽은 술,담배를 하지않는것과 합리적이지않은 문화방식입니다. 모든것이 수직화된 조직체계이면서 관념적인 문화라서 합리적인 토론이 불가능한 조직입니다.  이런면들이 나의 실리적인 사고방식과 맞지않았습니다. 특히 술,담배를 않하는것은 치명적인 사회생활의 단점이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게이생활하면서,게이라서 말못하고 당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일종의 한국의 게이인권상황아래서 그 상황을 역으로 이용해서 사람들한테 사기를 치는식입니다. 사실 직장생활하는 사람으로서는 자신이 게이라는 것을 노출시키면 사회생활하기 어려운것이 한국의 현실인데… 

가령, 게이바에서 술을 마시고는 한두번 만나고난뒤에, 서로 잘모르는 상황에서 돈이 급해서 돈빌려달라고 하는사람.. 이런사람은 당연히 전문적인 사기꾼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잘 알지도 못하는사람한테 돈이야기 않하죠…가까운친구에게 먼저 말하기 마련이죠… 찜질방 이런데서 괜히 게이인척 유도해서 몸을 건드리면 들고 일어나서 조직같은 행동을 하는넘들…일종의 게이들 등쳐먹고 사는넘들… 그런데 게이로서 이런사람들을 경찰에 신고할수도 없어서 알면서 당해야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겁니다. 이런일들로 게이들이 알면서 당하지 않도록  한국경찰들중에도 게이인권을 보호해줄수있는 경찰부서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특히 게이바가 운영되고 있는 지역에서는 반드시 필요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던중에 직장생황이 10년정도 되었을즈음 내성격에 회사생활이 맞는것도 아닌데, 그만두고 다른것을해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한국에 IMF 가 왔다고 조기 명퇴희망자를 회사에서 찾길래, 그서류를 지원했습니다. 그래서 그 서류를 접수하고 난다음에 바로 카나다 이민서류를 준비했습니다. 그당시 카나다 이민이 붐이었는데필요한정보나 서류를 이민전문업체에 설명회에서도 얻고, 그당시 인터넷에 나오는 자료를 모으고해서, 카나다 이민웹사이트에서 자료를 다운받아서 스스로 작성하고, 자기소개서 같은 영문이 필요한 부분은 번역업체에 맡겨서 서류를 3개월정도의 준비기간을 통해서 접수시켰습니다.그리고는 영어회화부터 배우러 다녔습니다.

 

 이민서류는 그 당시는 필리핀 마닐라 카나다 대사관으로 다 보내야했습니다. 그서류를 접수시켜놓고 약 2년정도의 기간이 다 되어깄을때 영주권을 받았습니다. 그당시는 많은 한국인들이 이민을 신청해서 갑자기 이민서류가 폭주한 상황이기도 하고, 카나다 대사관 이민 수속자체가빠르게 진행되지는 않았습니다.

 

명퇴를 하고 영주권을 받고 카나다로 들어오기까지 약 3년간의 갭이있었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처음에는 영어공부에 집중하려고 했는데…그렇다고 영어가 금방 늘어나는것도아니고…..그래서 잠시 비지니스를 경험해보자고 작은돈으로 소규모 가게도 한번해보고…약간의 돈을 잃었지만, 그냥 경험한걸로 만족합니다. 그리고는 다른신용카드사 프로젝트에 단기간 계약직으로 근무도 해보고….그러다가 영주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영주권을 받았을즈음 어머님이 중풍으로 쓰러지셨습니다. 그래서 별로할일없는 내가 어머님을 좀 돌봐드리려고 했는데..그게 또..내가 남자이다보니..좀 어려운 구석이 있더군요. 내가 요리를 해서 어머님을 돌보고, 목욕도 좀 시켜드려야하는데…나는 요리에 관심이 없는데다가…어머님이 어린아들자식한테 알몸을 보이는게 여간 당황한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큰누님께 어머님을 돌보아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주로큰누님과 내가 어머님을 돌보는 당번이 자연스럽게 되었습니다. 큰누님이나 나나 어머님을 생각해서 하는일이었는데… 큰아들인 큰형은 어머님이 병원에 계실때도 얼굴도 한번 않비추고…큰형수를 운전해서 태워주고는 병원밖 차안에서 기다렸다고 그럽니다. ( 미친넘이지…) 당연히 큰아들이 저지랄을 하는데..큰형수도 똑같은수준이지… 

 

아무튼…그래서 2002년 2월말경에 카나다로 이민비자가 유효기한이 만료되기 직전에 대충꾸려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카나디언으로 정착하기위해서 바닥부터 시작했다고 생각하면 맞을겁니다.

  

====================

이건 저와 비슷하게 파고다극장에서 게이를 알게된 사람의 이야기가 있어서 링크해놓았어요. 너무 재미있어요.

https://m.cafe.daum.net/truepicture/Qt7/122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