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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의 문학노트 ( Saemter's Writing note )

[아트인문학을 읽고] 정리 노트.

by 샘터0 2021. 11. 27.

아트 인문학을 읽고 난후에 나를 위해 정리한 노트입니다. 책을 직접읽어보시지 않으면 도움은 않될것같습니다.

이책을 읽어보면서, 피카소가 천재적인 화가로 알고있었는데, 사실은 피카소는 다른사람의 아이디어를 자기것으로 체계화시켜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컬렉터들이 찾도록 하는데 열중한 화가였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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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책의 끝에 저자가 제시한 내용이 실제적으로 활용가능한 도움을 주는 글이라 생각되어서 먼저 언급하련다.

 

1) 틀밖에서 생각하기 위해

무엇을 대상으로 해야할지: 뭔가 불편하고 진부한것을 찾아라.

대상을 정했다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할지를 알게 된다면 좋을것이다.

분석: 그것의 본질과 형식을 구분하라.

전략: 이면에 숨겨진 강력한 고정관념을 뒤집어라.

 

횡단하고 질주하는 삶으로.. 앞으로 직업세계는 이렇게 양극화된다고 한다.

-전문성을 갖춰 인공지능을 부리는 자유시민.

-언제든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수 있는 노예.

 

마지막으로 지금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무엇부터 해야할지 한번 정리해보자.

[해머와 다리미]

먼저 지금의 삶을 점검해보자. 만약 홈에 머물러 있다면 직장인 마인드부터 버리자. 미련의 잔재가 남아 있을 땐 깔끔하게 다려서 미련의 싹을 없애자.

 

[보이지 않는 신과 거대한 신전]

산업시대부터 섬겨온 불편하고 진부한 신들을 버리자. 학벌, 인맥....정말 많은 신들이 있을것이다.이 모두들 부숴버린뒤, 마음속에 나만의 신전을 짓자. 그리하여 나를 돌아보고 나를 깨닫게 해주는 두려운 신과 마주하자. 중요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것이다.

 

[황금 송아지와 거지 차림의 예언자]

홈에서 빠져나와 대지에 발을 딛고 섰다면 다시 우리를 유혹하는 황금 송아지에 현혹되지 말고, 위대한 예언자를 찾아 열심히 배우자. 자신의 지평을 만들어가는 이들과 만나고, 꼭 필요하다면 그의 제자가 되어 뒤를 따르자.만약 필요하다면 스스로 예언자가 되어도 상관없다.

 

[정착민과 유목민]

인공지능을 부릴만큼 스스로 전문성을 확립하게 되었다면 이젠 유목민의 삶에 도전하자. 스스로 지평을 열어가며 안주한다는 자각이 들때마다 다시 새로운 대지와 마주하자.

 

[제작자, 연기자 그리고 기획자]

제작은 이제 인간의 일이 아니다. 독창성에 통찰력을 더해 탁월한 기획자가 되자. 필요하다면 멋진 연기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자.

 

현대 미술의 흐름의 순간을 아주 간단하게 짚어본 내용이 도움이 되어서 먼저 언급하련다.

2)19세기말의 거장들.

19세기말의 거장들(현대미술 개화에 큰 영향을 미친 예술가들)

 

Gustave Moreau ( 1826-1898)

신화나 종교를 주제로 신비롭고 기괴한 작품을 선보인 상징주의 회화의 거장. 에콜 데 보자르 교수로 재직하며 말년에 마티스,루오 등을 가르쳤다.

 

Èdouard Manet ( 1832-1883)

관습적 회화에 반기를 들고 인상주의 그룹을 이끈 화가. 미술계를 뒤집은 요란한 스캔들로 유명햐졌고, 모더니티 이론에 입각해 번영하던 파리의 모습들을 그려냈다.

 

Claude Monet ( 1840-1926 )

인상주의의 대표자. 빛을 포착한 그림으로 인상주의를 창시했으며 수련,루앙성당 등 동일한 대상을 반복해서 그린 연작시리즈가 유명하다.

 

August Rodin ( 1840-1917 )

근대 조각의 선구자. 극사실적 기교로 인정받은뒤, 작품에 내적성찰을 담은 꿈틀대는 생명력을 구현하여 당대 조각계를 지배했다.

 

Pual Cézanne ( 1839-1906 )

인상주의를 거쳤으나 인상주의의 한계를 깨달았으며, 기존회화의 근간을 뒤흔드는 새로운 회화를 선보여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부른다.

<사과 바구니>1895, 시카고 미술관, 이작품에서는 테이블 모양을 유심히 봐야한다. 앞쪽 뒤쪽 모두 선을 이어보면 어긋나 있다. 또한 좌측과 우측 테이블의 경사진 각도도 다름을 알수있다.

 

Paul Gauguin ( 1848-1903 )

후기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후배들을 이끌고 브르타뉴의 삶을 그리며 종합주의를 추구했고, 나중에는 문명을 등지고 타히티에서의 삶을 그리며 여생을 보냈다.

자연을 그린다는것은 똑같이 베끼는게 아니라, 화가가 느낀바를 제대로 보여주는것이다. -폴세잔

 

Vincent van Gogh ( 1853-1890 )

인상주의의 영향과 고갱과의 교류룰 통해 자신만의 열정적인 화풍을 완성한 화가, 평생동생의 지원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말년에는 정신질환으로 고통을 받았다.

 

Georges Seurat ( 1859-1891 )

색채학과 광학이론을 바탕으로 인상주의 극단적으로 변형시킨 점묘화를 창시한 화가. 장식적아름다움으로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Paul Signac ( 1863-1935 )

요절한 쇠라를 계승해 점묘화를 발전시켜 화단을 대표하는 자리에 올랐으며, 야수주의, 미래주의, 오르피즘등 새로운 미술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생트 빅투아르 산과 검은 성> 1905, 브리지스톤 미술관. 세잔은 원근법 구도에 맞춰그리지 않았다. 그는 자연을 마주하고 있으면 자연이 몸안에서 자랐다고 했는데, 그림은 그 느낌 그대로를 화폭에 옮기는 작업이었다. 그는 매우 더디게 작업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의 생각속에서 자연이 지라는 속도에 마추기 위해서였을것이다.

 

3) 

1부 미술 홈에서 빠져나오다 ( 20세기 전반부, 미술이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살펴본다 )

 

틀 밖에서 생각하라 1.--------------------------------------------------------------

탈원근법: 해머와 다리미.

이번장에서 우리는 고전미술의 파괴자들과 만나보았다.

* 너무 감각이 좋으면 창조성에 방해가 된다 - 파블로 피카소-

 

-1905년 야수주의의 등장을 알렸던 살롱도톤.

              앙리 마티스 “ 눈으로 본것과 전혀 다르게 칠해도 상관없다.”

-1907년 < 아비뇽의 여인들> 관람후 피카소를 찾아간 순간

             조르주 브라크 “원근법은 눈을 속이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1912년 오르피즘을 탄생시킨 섹시옹도르 살롱전

             로베르 들로네 “색체들만으로도 회화가 만들어질 수있다.”

-1915년 절대주의를 낳은 <0.10 마지막 미래주의 전시회>

             카지미르 말레비치 “자연을 연상시키는 그 어떤것도 배제하라”

-1947년 롱아일랜드 작업실에서 드리핑기법을 발견한 순간.

              잭슨 폴록 “회화는 캔버스에 흐르고 뿌려진 물감이다.”

 

틀 밖에서 생각하라 2. --------------------------------------------------

탈지각: 보이지 않는 신과 거대한 신전.

*예술이란 명확하고 잘 아는곳에서 한 발 내딛어 비밀스럽고 감춰진 곳으로 향하는것이다.- 칼릴 지브란-

 

-1905년 다리파를 창설하고 어린소녀들과 지내던시절

               Ernst Kichner “ 순수한 원초적 세계를 그려라”

-1911년 신지학에 몰두해 '신에술가동맹'을 떠나는 순간

              Wassily Kandinsky “종교적 체험을 통해 보이는 것 너머를 그려라 “

- 전쟁터에서 자동기술의 아이디어를 떠올린 순간

               André Breton “가장 진실한 예술은 무의식에서 분출한다”

-1958년 8개월의 성찰로 자기 그림의 의미를 때달은 순간.

              Barnett Newman “그림은 숭고함을 체험하는 장소다.”

- 정육점 진열대에서 고깃덩어리 그림의 착상을 떠올린 순간

               Francis Bacon “그림은 강렬한 충격을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틀밖에서 생각하라 3.---------------------------------------------

탈권위:황금송아지와 거지 차림의 예언자.

* 그 어떤 창조행위도 그 시작은 파괴일 수밖에 없다. -파블로 피카소-

 

-1913년 동료들의 요구에 작품전시회 포기한 순간

              마르셀 뒤샹 “망막적 미술을 극복하는게 목표다.”

-1916년 카바레 볼테르에서 펼쳐진 음향시 공연

             휴고 발 “ 기존 문화와 예술을 마음껏 조롱할것이다.”

-1962년 페러스 갤러리에서 열린 첫번째 개인전

              앤디 워 홀 “ 대중들이 좋아하는 이미지도 예술이다”

-1959년 나치를 연상시키는 검은 회화를 전시한 순간

              프랭크 스텔라 “ 예술은 이제 어떤 감정도 생기지 않는 물질이다”

1962년 플럭서스 공연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던 순간

             백남준 “ 예술은 물질이 아니며 흘러가는것이다.

 

2부 미술 드넓은 세상에 펼쳐지다 ( 고전미술에서 완전히 해방된 미술이 부단히 자신의 지평을 넓혀가는 과정을 살펴본다 )

 

틀밖에서 생각하라 4-------------------------------------------------

탈형식: 정착민과 유목민

*다른사람의 삶을 살지 마라. 다른 이의 생각에 사로 잡히지 마라.-스티브 잡스

 

-1914년 피카소를 찾아가 구축주의의 아이디어를 얻은순간

              블라디미르 타틀린,” 재료 그 자체가 예술이다”

-1957년 “미니멀 아트”라는 이름을 낳은 합동전시회

             로버트 모리스 “이제 예술가는 구성과 제작을 하지 않는다.”

-1958년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텅빔> 전시 오프닝

              이브클랭. “예술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내야 한다.”

-1970년 켄트 주립대학 장작 헛간에 흙을 퍼붓던 순간.

            로버트 스미스슨.”저 대지가 예술의 장이다.”

-1971년 살럿 무어맨과 <TV 첼로와 비디오 테이프를 위한 협주곡> 공연

             백남준 “앞으로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체할것이다.”

 

틀밖에서 생각하라 5.----------------------------------------------------

탈물질: 제작자, 연기자 그리고 기획자

*예술가가 '저거다' 라고 하는 순간 예술이 된다. - 마르셀 뒤샹.

 

-1958년 <젝슨폴록의 유산> 기고문에서 행위예술을 주창한 순간

              앨런 카프로, “그 어떤 행위도 이제 예술이 된다. “

-1961년 세상을 발칵 뒤집은 < 예술가의 똥> 전시

              피에로 만초니, “ 예술가에게서 비롯된 것이면 똥마저도 예술이 된다.”

-1970년 자신의 작품을 화장장에서 불태운 순간

              존 발데시리, “예술가는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1965년 죽은 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한 공연

              요제프 보이스,”예술가는 생명을 되살리는 샤먼이다.”

-1988년 만리장성을 걸어 연인과 이별한 순간

              마리아 아브라모비치, “행위예술도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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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미술

정보화 시대에 맞춰 대단히 역동적으로 변화해갈것이다.

인공지능은 예술가의 매우 강력한 도구임이 명확해지고 있다.

디지털세상에서는 미디어아트의 중요성이 더 커지게 된다.미술과 음악, 공연, 영화등 여러쟝르가 뒤섞이는것은 불가피하다. 이외에 Metaverse 라고 불리는 가상현실이나 VR등 새롭게 대두되는 분야도 미디어아트와 결합해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 낼것이다.

 

이세상 어디에도 본래 있었던 길은 없다.

당신도 예술가다.-요제프 보이스

 

4) 책안에서 언급된 화가와 작품들의 설명을 모았다.

개인적으로는 작품들의 설명을 보면서야 왜 이작품이 전시되는지 그 이유를 알게되었다.

나는 예술은 사람마다 자신의 느낌으로 느끼는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유명한 작품이더라도 나는 내가 아는한계안에서만 느낄수 있었다. 그런데 작품의 설명이 들어있는 내용을 보면서, 이 작품들이 미술사에서 중요한 작품이라는것을 알게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사람마다의 취향이 있는 것이고, 안목이 있는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호가가 높은 그림이라도 내가 느낌을 얻을수 없다면 나에게는 별로인작품일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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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가 열리고 미술은 완전히 달라졌다. 인상주의 이래 위대한 선구자들이 남긴 유산을 창조의 시대를 열었고, 열정 넘치는 젊은이들을 파리로 불러 들였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이 새로운 미술은 유럽전역으로 퍼져나가 세상을 가득 덮었다. 마치 본래부터 그렇게 활짝 피어 있엇던것처럼...

 

이 시기는 미술이 과거에 깊게 파인 홈으로부터 빠져나오는 때다. 그 과정을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볼때 그발원지는 세잔일것이다. 그에게서 시작된 물줄기는 입체주의의 큰봉우리를 휘감아 결국 추상이라는 호수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이어질것 같았던 흐름은 두차례의 세계대전과 경제 대공황의 격랑속에서 크게 뒤틀린다.비극속에서 탄생한 다다이즘은 초현실주의로 이어졌고, 이 흐름 또한 추상과 더불어 20세기 전반기를 지배했다.

 

예술가들을 가두고 있던 가장 깊은 흠은 “재현 Representation 이라는 이름의 흠이었다. 그것은 당연했다. 미술은 본래 무언가를 닮은 모습으로 만드는 것이었으니까..그런데 놀랍게도 예술가들은 이 깊은 홈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드넒은 대지 위에서 미술을 다시 시작할수 있었다. 과연 어떤일들이 있었기에 그리 되었던 것일까 ? 그 과정을 보여주는 두갈래의 선을 지금부터 따라 가보자.

 

1부 미술 홈에서 빠져나오다 ( 20세기 전반부, 미술이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살펴본다 )

 

[입체주의]

앙리 마티스 ( Henri Matisse (1869-1954 )

*순수한 색은 그 자체로 보는 이의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앙리 마티스.

야수주의로 현대미술의 문을 연 화가. 당대에 최고의 자리를 두고 피카소와 경쟁했으며 가장 성공한 예술가로 손꼽힌다.

 

      <모자쓴 여인 >1905,샌프란 시스코 미술관,

       자유분방하게 채색된 이 작품이 당시 파리 미술계에 던진 충격은 상상할수 없을만큼컸다고 전해진다. 이는 현대미술의 시작점으로 인정받는 근거가 되었다.

     <사치,고요,쾌락>: 1904. 오르세 미술관,

     1905년 봄에 발표된 이작품에는 시냐크로부터 받은 영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모든공간을 점으로 찍어 표현했던 시냐크와는 달리 마티스는 꿈틀틀거리는 윤곽선을 과감하게 시도했는데 시냐크는 이에 대해 불만을 표하지 않았으며 흔쾌히 이작품을 구했다고 한다.

     <삶의 기쁨>1905,반스재단,

     이 작품의 습작을 보면 점묘화의 영향이 남아있다. 하지만, 1906년 봄에 발표된 완성작에는 점묘화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수 없는데, 마티스를 제자로 여기던 시냐크는 크게 격노했다고 전해진다. < 모자 쓴 여인 > 의 성공이후 큰 부담을 안고 그린 이 작품에서 마티스는 고전적 누드를 소재로 가져왔는데, 구성에서는 세잔과 고갱을 적극 참조한것으로 보인다.

 

마티스의 초상화는 세잔의 영향을 받았다. 세잔은 보이는대로 그리는것이 아니라 화면을 새로 구성하면서 색을 짜 맞춰나갂는데, 그러다보니 얼굴빛이 자연스럽지 않고, 얼룩덜룩한 느낌이난다. 마티스는 세잔을 참조하면서도 통념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원색을 구사했다. 이는 색채가 해방된 순간이었다.

 

André Derain ( 1880-1954 ) 야수주의의 주역. 화상 블라르의 후원으로 런던에서 그린 그림들이 유명하다. 훗날 야수주의를 탈피,다양한 쟝르를 실험했다.

 

Maurice de Vlaminck (1876-1958 ) 빈센트 반 고호와 폴 세잔의 영향으로 야수주의에 뛰어들었으며 가장 역동적인 작품들을 선 보였다.

       < 앙드레 드랭의 초상> 1906,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절친인 동료가 가진의 얼굴을 온통 붉게 칠해 버린 이거친 작품에 대해 드랭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 앙드레 드랭의 반응에대한 공식적이고 직접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아 알수 없지만, 이작품을 정말 마음에 들어했음을 간접적으로 알수있다. 그가 죽을때까지 이 작품을 소중히 간직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작품은 야수주의가 무엇인지 이해하는데 가장 적절한 작품의 하나다.

 

*Gertruce Stein ( 1874-1946)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를 발굴하고 정상의 자리에 오르도록 하는 등 미술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컬렉터이자 작가 및 평론가.

 

1) 입체주의 ( Cubism) + 종합적 입체주의 : 

Georges Braque ( 1882-1963 ) 피카소와 함께 입체주의를 창시해 이후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화가,피카소와는 달리 입체주의를 끝까지 지켰다.

 파블로 피카소<에스타크 풍경>1907, 미니애폴리스 미술관, 브라크가 <아비뇽의 여인들>을 보기전에 그린 작품이다.강렬한 원색을 과감하게 구사하면서 야수주의에 몰두해 있음을 드러내나, 한편으로는 집과 교각들을 단순한 도형처럼 견고하게 그리면서 세잔의 영향 또한 드러내고 있다. 브라크는 이무렵 혁명적인 미술을 구상하고 있었다.

        < 기타를 든 사람> 1911-1912, 뉴욕 현대미술관,

이무렵 피카소와 브라크는 파괴적인 실험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전의 입체주의 작품과 비교해보면 무엇을 그린것인지 도무지 알 수없을 만큼 화면을 파편화했다.브라크는 이무렵 글자를 화면 곳곳에 넣은 실험도 하고 있었다

       <에스타크의 집들> 1908, 베른 미술관,

이작품은 피카소와 공동작업을 시작한 초창기의 작품으로 만져질듯한 질감의 표현에 집중했다. 입체주의라는 용어를 낳게 한 중요한 작품이다.

 

Jean Metzinger (1883-1956 ) 초기부터 입체주의에 적극 투신하였고 인물화로 많은 인기를 누렸으며, 입체주의를 이론적으로 구축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 부채를 든 여인 > 1912,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퓌토그룹의 입체주의는 피카소나 브라크와는 달리 깔끔한 구성과 다양한 색체로 대중들에게 보다 쉽게 다가갈수 있었다.

 

Albert Giezes ( 1881-1953 ) 메쳉제와 더불어 퓌토그룹( Group de Puteaux )을 대표하는 화가. 다색조의 풍경화를 즐겨 그렸다.

 

파블로 피카소

            <기타> 1914, 뉴욕현대미술관.

피카소는 1912년에 하드보드지로 이 작품의 첫번째버전을 만들었고, 이후 철판으로 다시 만들었다. 이는 콜라주 작업에서 진화한것으로 전통적인 조각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조형물이었다.그런데 피카소는 이분야를 더 발전시키기보다는 본래의 분야인 회화로 돌아갔다.

 

오르피즘(Orphism, Cubism Orphique ) : 로베로 들로네

Robert Delaunay( 1885-1941 ) 오르피즘의 대표주자. 색체학에 관심이 많아 순수추상에 근접한 작품을 선보였고, 유럽전역의 추상화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 동시창문> 1912,함부르크 미술관,

완전한 추상처럼 보이나 실은 창문에 비친 파리풍경을 그린것이다.가운데에 에펠탑의 형상이 보인다. 형형하지 않은 유리를 통과한 빛이 마치 프리즘을 통과한 듯한 색체효과를 보여준다. 유리너머 풍경을 정확히 그리던 관습에서 벗어나, 색체가 어린 유리면 그 자체를 그렸다는 점에서 환전한 평면성에 도달한 작품이며 추상의 선구적 작업으로 인정되고 있다.

           <동시대비: 해와달 > 1913, 뉴욕현대미술관,

들로네가 대단한 인기를 누리던 시절에 그려진 작품이다. 들로네는 입체주의와 추상미술을 잇는 가굑로 평가되는데 그의 화려한 색체사용은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을 매료시켰고,그가 구현한 평면성은 추상미술의 전개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Frantisek Kupka ( 1871-1957 ) 체코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색체를 위주로 한 비구상적 화화를 선보였다.그래서 그를 추상의 선구자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오르피즘의 의미에 가장 잘 부합했던 화가.

               < 아모르파, 두색의 푸가> 1912, 프라하 국립미술관

 

2) 절대주의 : 카자미르 말레비치

Kazimir Malevich ( 1878-1935)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남, 가장 완전한 추상을 최초로 선보인 절대주의의 창시자, 말년에 소비에트의 탄압으로 고초를 격었다.

 

              < 0.10 마지막 미래주의 전시회 >

 다소 복잡하게 여러 도형으로 구성한 작품도 있지만, 대부분은 단색의 단순한 도형이 주를 이룬다. 구석 상단에 걸린 < 검정 사각형> 이 이전시의 대표작이렀다고 한다.

              < 눈보라 친 마을의 아침> 1912.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농촌 이미지를 즐겨 그린 말레비치는 초기 레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대상들을 원통과 큐브형태로 그린것이나 빨강과 파랑을 즐겨 사용한것은 레제의 화풍이다.

            < 태양에 대한 승리, 2막 1장을 위한 스케치>1913,

러시아 국림연극음악박물관, 말레비치가 절대주의 추상을 발전시키는데에 중요한 계기가 된 스케치다.

              <검은 사각형> 1915, 크레티야코프 미술관.

말레비치는 오페라 배경 디자인에서 이작품의 영감을 얻었다. 당시 오페라 배경작업으로 찬사를 받았을때, 대단히 신비롭다는 평을 들은바 있다.

            < 절대주의 구성:흰색위의 흰색> 1918, 뉴욕현대미술관,

어느날 말레비치는 흰 캔버스에 검은 사각형만 올려놓은 그림 역시도 어디서 본듯한 무언가를 연상시키는 데다,색의 차이로 인해 약간이나마 원근법으로 보인다고 자책했다. 한동안 고심한 그가 해결책으로 그려본것이 바로 흰 사각형을 비스듬히 그린 이 작품이다. 말레비치는 이작품에 만족했으나, 이후 다시금 고민에 빠져들었다. 자신이 더이상 나아갈수 없는 절벽끝에 서버렸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절대주의는 미술의 끝이었다.

 

Fermand Léger ( 1881-1955 ) 들로네와 교류했으며 색체가 풍부한 원통의 이미지를 주로 사용해 자신만의 독특한 입체주의를 전개했다.

 

Wassily Kandinsky ( 1866-1944 )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인정받는 러시아 화가. 독일에서 늦깍이로 미술을 시작했고 표현주의 유파인 청기사파로 활동했다.

*아름다움이란 오직 내면의 욕구와 영혼에서 솟아나는 것이다.

                    < 무르나우 그 거리 > 1909, 렌바흐 하우스 미술관,

신예술가동맹을 결성하던 무렵의 칸딘스키는 지나치게 추상적이거나 신비주의적이지 않았고, 그저 표현주의의 화가였다.

                    < 즉흥 30(대포) > 1913, 시카고 미술관,

추상적으로 그려졌지만 찬잔히 살펴보면 무엇을 그렸는지 알수있는 작품이다. 오른편에 보이는 대포가 불을 뿜자 뒤편의 건물들이 쓰러지는 모습이 보인다. 색채는 번지는듯하고 선은 유동적으로 그려졌다.

                     <구성6> 1913, 에르미타주 미술관.

이작품의 부제는 “대홍수”로, 구약의 대홍수와 신약의 세례등 물과 관련한 종교적 테마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을 그리던 무렵 칸딘스키는 신지학에 대단히 몰두해 있었으며 표현도 대단히 추상적이었다.

                    < 원안의 원들> 1923, 필라델피아 미술관,

칸딘스키가 완전한 도형과 직선만으로 화면을 구성한것은 바우하우스 교수가 된 이후인 1923년경이다.

 

피터르 몬드리안,

                   <작품 1> 1921, 덴 하그 미술관.

몬드리안을 중심으로 한 네덜란드의 추상은 디자인적으로도 완성도가 높았기때문에 그의 데 스틸 운동 동료들은 인테리어나 건축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몬드라안은 동료들과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회화만을 추구했다.

                  < 그리드 9> 1919, 덴하그 미술관.

몬드리안이 스쿤마커스의 삼색이론을 깨우친 직후 그린 작품이다. 자신만의 전형적인 스타일로 나아가는 마지막단계라 할수있다.

 

3) 액션 페인팅: 잭슨 폴록

Jackson Pollock ( 1912-1956 ) 추상표현주의의 대표 주자. 미국 미술이 세계를 선도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으나 말년에 알콜중독으로 크게 고생했다.

                <가을의 리듬: No.30 > 1950,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엄밀히 말하면 흘리고 뿌리기 기법은 플록의 독창적인 창안이 아니다. 앞서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다분히 장난스럽게 이런 기법을 실험한바 있으며, 멕시코벽화에서도 이화 유사한 기법이 즐겨 구사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플록은 멕시코 벽화를 배울때 이런기법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고, 몇몇 작품이 새롭게 느껴진것은 특정부분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이 기법만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대규모의 정식 작품에서 이렇게 그린것은 폴록이 최초다.

                <심연> 1953, 조르주 퐁피두 센터,

폴록은 대단한 명성을 얻었지만, 작품이 늘 비슷하다는 비판에 괴로워했다. 1950년대 접어들어 그는 이 작품처럼 붓질로 그린 추상을 시도하면서 동시에 젊은날 그렸던 초현실주의 스타일의 구상회화도 시도했다. 중증 알콜중독 상태에서 그린 이작품에는 절망과 공포의 심경이 검은색 심연에 잘 드러나 있다.

 

Lee Krasner ( 1908-1984 ) 추상표현주의 화가, 폴록의 아내로 결혼후 자신의 경력을 희생한 내조로 폴록을 최고의 화가로 만들었다.

 

Peggy Guggenheim ( 1898-1979 ) 자유 분방한 삶을 살았던 미술 컬렉터. 전쟁중 많은 작품을 사들였고, 플록을 비롯해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4) 형식주의/상징주의/인상주의

Edvard Munch ( 1863-1944 )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현대화가, 표현주의의 선구가이며 삶의 트라무마로 격게된 정신적 고통을 작품으로 그려냈다.

             < 그 목소리 혹은 여름밤> 1896, 뭉크미술관,

뭉크의 작품에는 죽음의 공포를 다룬것이 많지만, 그에 못지않게 실연의 트라우마를 다룬것도 많다. 이런작품에서 아름다운 여성은 남자의 모든것을 앗아가는 뱀파이어로 묘사된다. 연인들이 찾는 바닷가 유원지 으슥한 곳에서 마주한 이 여인은 아름다우면서도 웬지 모를 두려움을 불러 일으킨다.

 

Ernst Kichner( 1880-1938 ) 독일 표현주의의 선구자. 원초적 화풍으로 디라파를 이끌었으나 말년에 나치에게 퇴페예술가로 낙인찍혔다.  *화가는 겉모습을 정확히 그리면 안된다. 사물의 모습을 새롭게 창조해야 한다.

                키르히너가 목각으로 새긴 다리파 선언문(1905).

목판은 독일이 자랑하는 전통매체였다.원시부족글자의 느낌이 나는 간단한 선언문에는 낡은 미술을 거부하고 새로운 미술을 함께 만들어갈 이들의 동참을 호소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거리의 두 여인> 1914,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미술관.

화려한 원색으로 굽이치는 곡선을 즐겨 그렸던 키르히너는 베를린에 온뒤 이질감이 나는 색조로 거칠고 각진 형태의 인물들을 그렸다.이 작품이 그려진 때는 이미 멤버들 간의 불화로 다리파가 해체된 상태였다.

 

Franz Marc ( 1880-1916 ) 청기사파의 중심인물로 자연 세계의 동물들을 즐겨 그린 표현주의화가.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전사했다.

                <동물풍경> 1914, 디트로이트 미술관,

마르크는 동물을 잘 그린 화가로 유명했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대상을 그리던 그는 입체주의와 미래주의의 영향으로 화면 전체에 과감한 직선을 도입했다.

 

Flippo Marinetti ( 1876-1944 ) 이탈리아 미래주의를 주창한 시인이자 소설가. 열정적인 예술가들을 규합해 미래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Umberto Boccioni ( 1882-1916 ) 미래주의 화가이자 조각가. 미래주의의 지향을 실제 작품으로 구현한 탁월한 예술가였으나,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다.

                  < 공간속에서 연속성의 특수한 형태 > 1913, 뉴욕현대 미술관.

보조니는 안과 밖의; 구분이 없는 열린 신체를 창조했는데, 이 형상도 신지학의 세계관을 그대로 보여준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공간이 열리고 닫히며, 대기와 에너지가 조화롭개 순환하는 작용이 반복된다.

 

Luigi Rusolo. ( 1885-1947 ) 이탈리아의 미래주의 화가이자 음악가다.

소음기계 시연장면. 놀랍게도 이런 기계로 소음을 틀어대는 공연을 많은이들이 관람했다고 한다. 1914년 런던의 유명 공연장인 콜리세움에서 열린 공연이 그중 가장 유명하다. 물론 대부분의 공연은 관객들의 야유와 난동으로 중단되곤했다.

 

André Breton ( 1896-1966 ) 초현실주위를 주창한 시인. 자동기술을 창안했으며 강력한 추진력으로 전후에 이르기까지 초현실주의를 이끌었다.

André Masson(1896-1987 ) 초현실주의 화가. 자동기술을 조형미술에 적극 도입한 선구자이며 이후 주술적이고 몽환적인 작품을 그렸다.

Max Ernst ( 1891-1976 )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거장. “프로타주” 라는 긁기 기법을 창안했고, 신비감을 주는 풍경화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Georgio de chirico( 1888-1978 ) 그리스 출신의 이탈리아 화가. 적막하고 음울한 분위기의 작품들로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 이탈리아 광장> 1950. 만하임 미슬관.

그리스 태생의 이탈리아 화가인 데 키리코는 그리스 신화와 니체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앗으며 자신의 회화를 형이상학적 회화로 정의했다. 이는 형태, 즉 눈에 보이는것 너머의 세계를 그리는 회화라는뜻이다.

 

John Miro ( 1893-1983 ) 바르셀로나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조각가. 추상을 넘나들며 무의식을 탐구했고 소박하고 원시적인 주제를 친근감있게 구현했다.

                < 모성애> 1924. 스코틀랜드 내셔널 갤러리.

자세히 보면 치마를 입은 여성이 보인다. 여성의 양쪽 가슴에 아이가 매달려 있는 형상을 단순화해 그린 작품이다.

Mére Oppenheim ( 1913-1985 )

                 <오브제> 1936, 뉴욕현대 미술관.

이 찻잔으로 차를 마실수 있을까 ? 상상만으로도 이질감이 목구멍을 찌른다. 이처럼 강렬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다 보니 이 작품은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오브제가 되었다.

 

Barnett Newman( 1905-1970 )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숭고의 느낌을 추구했으며 캔버스를 뒤덮는 색면회화로 이후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작품은 스스로 말한다. 나는 그저 내버려둘 뿐이다.

                    <시작> 1946 시카고 미술관.

여전히 초현실주의적인 색체가 강하나 이전작품에 비해 평면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이 시시부터 뉴먼은 작품에 세로줄을 도입했고 이후 즐겨 사용했다.

                   < 하나임 1> 1948. 뉴욕 현대미술관.

뉴먼의 인생을 결정지은 작품이다. 중앙을 가르는 세로선은 뉴먼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수있는데, 훗날 지프zip 라는 별칭으로 더 자주 불렸다. 지프는 둘을 분리시키기도 하고 결합시키기도 한다. 유대인이었던 뉴먼의 작품에는 창세기 등 성서의 테마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 작품을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시도도 많다.

 

Mark Rothko ( 1903-1970 ) 뉴먼과 더불어 색면회화를 대표하는 화가. 경계가 모호한 색면으로 내면의 감정과 고통을 불러 일으키는 회화를 그렸다.

                      <NO.14> 1960.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로스코의 색들은 중첨되며 그경계가 모호하다. 이것이 바로 관람자의 심리를 깊숙히 파고드는 열쇠다.

 

Francis Bacon ( 1909 – 1992 ) 영국 현대미술의 시조로 불리는 아일랜드 출신의 화가. 불안과 폭력성이 뒤섞인 그로테스크한 작품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자화상> 1969[CR-69-13] 개인소장.

베이컨은 일생에 걸쳐 십자가 처형, 기괴한 모습의 교황, 친구들의 초상을 그렸으며 말년에 접어들어서는 주로 자화상을 그렸다. 형태를 잡아 그리면서 유화가 마르기 전 손이나 붓으로 비틀어버림으로써 해체되고 뒤틀린 모습으로 자신을 묘사했다. 그는 평소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끔찍하다고 말하곤 했다.

                 <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에 따른 연구> 1953[ cr-53-02], 디모인 미술관.

베이컨에게 악명과 함께 큰 성공을 가져다준 작업이 바로 이 '비명을 지르는 교황' 연작이다. 처음엔 비명을 지르는 입만 크게 그릴생각이었으나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접한뒤 교황의 모습을 점차 다양하게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엔터니 곰리

               <블라인드 라이트> 2007, 헤이워드 갤러리.

안개로 가득한 방, 빛이 강렬히 쏟아질수록 시야는 차단된다.불과 10센티미터앞도 보이지 않기에 방에 들어서는 이들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보지만,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타인과의 부딪힘은 피할수 없다. 곰리가 이 공간을 만들어 보여주려 했던것은 무엇이었을까 ? 한가지 분명한것은 이것이다. 그는 관람자의 시각이 완전히 차단되기를 원했다는것. 그는 전혀 새로운 모습의 신전을 지었다.

 

2부 미술 드넓은 세상에 펼쳐지다 ( 고전미술에서 완전히 해방된 미술이 부단히 자신의 지평을 넓혀가는 과정을 살펴본다 )

 

알베르 글레이즈

               <발코니의 남자> 1912, 필라델피아 미술관.

 

Marcel Duchamp ( 1887-1968 ) 뉴욕 다다의 주역이자 뉴욕 미술의 선구자. 독창적인 미학과 연이은 파격적인 작품으로 현대 미술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결과물로서 작품은 없어도 된다.물질 너머로 나의 관심은 오직 아이디에 있을뿐 눈에 보이는 결과물에 있지않다.

                  <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2> 1912. 필리텔피아 미술관.

뒤샹은 미래주의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지는 않았지만, 미래주의와 마찬가지로 기계와 역동적인 움직임에 끌렸다. 동료들에 의해 전시가 거부된 작품이었으나 이후 여러 전시회에 소개되면서 화가로서 뒤샹의 대표작이 되었다.

 

Jaque Villon ( 1875-1963 ) 입체주의 화가로 퓌토 그룹을 주도하였고, 추상작품도 많이 남겼다. 중견 화가로 이름을 알렸으나, 뒤샹의 형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Raymond Duchamp Villon ( 1876-1918 ) 뒤샹의 둘째형으로 조각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나 전쟁에서 얻은병으로 일찍 사망했다.

 

Francis Picabia( 1879-1953 ) 뒤샹과 함께 뉴욕현대미술을 선도했고, 뉴욕과 현대미술이 활발하게 교류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 우물가에서의 춤> 1912. 뉴욕현대미술관.

아머리쇼에 전시되어 인기를 얻었던 작품이다. 피카비아는 당시 오르피즘에 가까운 입체주의 작품을 그렸다.

 

Man Ray ( 1890-1976 ) 뒤샹과 함께 뉴욕 다다를 주도한 인물. 화가에서 사진작가로 변신해 사진예술을 발전시켰고, 다다와 초현실주의에 적극 참여했다.

                 < 초현실주의 첫 서류들 전시회 > 1942년 뒤샹이 기획한 초현실주의 그룹전이다.

거미줄처럼 얽힌 실들이 어두운 복도를 가로지르며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2분마다 요란한 기차 소리와함께 조명이 깜박이고 칸막이들은 마구 흔들거렸다고한다. 전시 오프닝때에는 이 혼란이 더 요란했다고 한다. 뒤샹의 지시에 따라 행사시간 내내 여러명의 아이들이 전시장을 뛰어다니며 놀았던것이다.

 

Hugo Ball ( 1886-1927 ) 독일의 시인,극작가, 무대 연출가로 전쟁을 피해 머문 취리히에서 공연장인 카바레 볼테르를 만들어 다다운동을 창시했다.

 

Tristan Tzara ( 1890-1963 ) 루마니아의 시인. 휴고 발에 이어 취리히 다다를 이끌었고, 이후 초현실주의의 핵심맴버로서 적극 활동했다.

 

Richard Hulsenbeck ( 1892-1974 ) 독일의 작가이자 정신분석학자로 취리히 다다를 경험한뒤 베를린에서 베를린 다다를 창설했다.

 

Jean Arp( 1886-1966 ) 독일계 프랑스 조각가로 '한스 아르프'라고도 부른다. 퀼른 다다를 시작했으며,추상과 초현실주의를 넘나드는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다.

 

Andy Warhol( 1928-1987 ) 팝아트의 대표주자. 대중에게 익숙한 제품과 인기 스타의 모습을 상업미술 기법으로 구현해 성공하였고 늘 이슈의 중심에 서 있었다.

                    <캠벨 수프 캔> 1962, 뉴욕 현대미술관.

워홀이 화가로서 데뷔할수있도록 해준 작품이다.이는 레디 메이드 개념을응용한것이지만,뒤샹과는 지향점이 달랐다,. 뒤샹은 기존의 예술을 전복하고 새로운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것이 목표였다면, 워홀은 상업적 이미지에서 새로운 차원의 미를 만들어내려 했다.

                  <황금색 메릴린 먼로>1962, 뉴욕현대미술관.

먼로의 사망 소식을 들은 워홀이 아이디어를 떠올려 만든 첫번째작품이다. 영화 <나이아가라> 스틸컷으로 만든 이 이미지는 워홀을 당대 가장 성공한 예술가로 만들어 주었다.

 

Roy Lichtenstein ( 1923-1997 ) 만화를 대형 캔버스에 회화로 그려내 팝아트분야에서 가장먼저 성공한 예술가이다.

                    <이봐,미키> 1961,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리히텐슈타인이 자기를 무시하는 어린 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린것으로 만화 회화는 물론 팝아트의 시작점에 해당하는 중요한 작품이다.

 

Frank Stella(1936- ). 후기 회화적 추상으로 사물로의 회화를 선보여 미니멀리즘에 영향을 주었고, 팝아트를 비롯한 다른 쟝르에서도 활약했다.

                  <깃발을 높이,Die Fahn Hoch!> 1959, 휘트니 미술관.

 

Jasper Johns ( 1930 - ).뒤샹을 계승한 네오다다의 대표주자. 대중적 소재로 사물성의 회화를 창시해 팝아트와 미니멀리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국기> 1955, 뉴욕현대미술관.

존스의 작품들은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평론가들이 찬사를 이끌어내는 힘이 있었다.그는 젊은 나이에 거장의 반열에 올랐으며 미국의 국민화가로 사랑받았다.

 

Robert Rauschenberg( 1925-2008 ). 제스퍼 존스와 함께 네오다다를 이끈 예술가. 늘 파격적인 작품을 연이어 선보였고, 그중 콤바인 작업이 가장 유명하다.

                    < 운울>1956,뉴욕 현대미술관.

미술교사를 그만두고 전업화가가 된 라우선버그는 한동안 캔버스 살 돈이 없을정도로 생활고를 겪었다. 그러다 문득 침대 시트가 눈에 들어와 그것을 벽에 걸어두고 그림을 그렸고, 이어 거기에 베개를 붙여보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떠 올랐는데 이것이 콤바인의 시작이었다.

 

Carl Andre ( 1935 - ). 미니멀리즘 조각의 대표주자. 동일한 재료를 선이나 격자형으로 늘어놓은 작품으로 유명하며, 일생동안 일관된 주제를 탐색했다.

                     <등가 1-8>1966,2014 뉴욕 디아비컨 미술관 전시장면.

이작품은 각기 흩어져 전시되기도 하지만, 이처럼 한데 모아서 감상해야 안드레의 생각을 제대로 쫓아갈 수 있다.

                     <43 으르렁거리는 40 > 1968, 크롤러 뮐러 미술관.

누구나 그위를 걸어갈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면서 이것이 미술 작품인지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은 작품이다.

 

La Monte Young( 1935- ) 미국 최초의 미니멀리즘 음악가.하나의 음만 계속연주하는 독특한 곡을 선보여 이후 전위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

 

Donald Judd ( 1928-1994 ) 미니멀리즘을 정립한평론가이자 예술가. 회화에서 시작해 조형으로 나아갔으며 말년에 거대한 스케일의 작업을 했다.

 

Robert Morris( 1931-2018 ) 미니멀리즘 조각가. 저드와 쌍벽을 이루는 미니멀리즘 이론가이며, 이후 다양한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무제>1965.

우리의 감각에는 이 세조형물이 전혀 다른 모양처럼 다가오지만, 머리는 이 세조형물이 같은것이라고 말한다. 이럴땐 이성이 옳은것일까. 감각이 옳은것일까.

 

Conataintin Brancusi ( 1876-1957 ) 현대조각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루마니아 조각가. 평생에 걸쳐 추상조각을 개쳑했다.

 

George Maciunas( 1931-1978) 플럭서스의 창시자.플럭서스의 이론을 정립하고 국제적 운동으로 확산하는 데 중심적 역활을 했다.

 

백남준 (1932-2006).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전위음악을 전공했으며 플럭서스에 뛰어들어 명성을 얻었고, 이후 비디오 아트를 장시해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음악이 있는 네오다다> 1962년 6월 뒤셀도르프 극장에서 공연.

이 시기까지는 플럭서스와 네오다다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사진속 장면은 누구나 바이올린을 박살내는 행위일뿐이라고 하겠지만, 백남준에게는 천천히 들어올린뒤 내리치기까지 정확히 2분이 걸리는 바이올린 연주다.

                   <머리를 위한 선> 1962년 바스바덴에서 열린 플럭서스 공연.

짧은머리에 먹물을 잔뜩 묻혀 긴 화선지에 선을 그어나간 공연.

                   < TV 부처 > 1974, 백남준 아트센터.

백남준을 비디오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하게 해준 이작품은 전시장에서 가장 인기가 높다. 백남준 아트센터에 있는 이 작품은 2022년 다시 제작된것이다.

 

Ono Yoko( 1933- ).일본의 행위 예술가. 플럭서스 활동으로 명성을 얻었고, 비틀즈의 멤버 존레넌의 아내로 유명하다.

                 <컷 피스> 1965년 카네기 리사이틀 홀에서 열린 공연.

공연이 진행된뒤 옷이 사정없이 잘려나간 오노요코가 무대에 앉아있다.

 

Kubota Shigeko( 1937-2015 ). 일본의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을 흠모해 플럭서스 운동에 뛰어들었으며, 백남준의 아내가 되어 비디오아트를 발전시키는 데 협력했다.

                   <버자이너 페인팅> 1965년 뉴욕 시네마테크에서 열린 <영구적인 플럭서스 페스티벌> 에서 최초로 선보였다.

 

리처드 프린스

                   <무제>1989,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프린스는 사진계에서 악명높은 인물이다. 그는 잡지에서 좋은사진을 보면 그것을 사진으로 찍어 크게 현상한 뒤 전시회를 열었다. 이 <무제>도 잡지에 실린 담배 광고 사진을 찍은것이다.광고 이미지는 물론 영화 포스터 역시 그의 먹잇감이 되었고, 요즘은 남의 인스타그램 사진을 허락도 없이 전시한다. 그는 평생 저작권과 초상권 소송을 당하고 있지만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사진을 팔아서 엄청난 돈을 벌고 있기에 그돈으로 배상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른바 훔쳐도 예술이 되고 또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인물인데, 당연히 이러한 행동은 여전히 많은 논란에 휩싸여 있다. 그의 이런행위가 예술이 되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그는 이미지 홍수시대를 살아가면서 '이 사진이 지금의 세상을 제대로 보여준다' 라고 느낀 순간에만 셔터를 누른다.그래서 그의 사진은 세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연대기가 되는것이다. 도둑질도 평생하면 예술이 되는것일까 ? 그리고 그 역시 악당 차림의 예언자인 것일까 ?

 

리처드 해밀턴

<도대체 무엇이 오늘의 가정을 그토록 색다르고 매력적인것으로 만드는가 ? > 1956, 튀빙겐 미술관.

 

Vladimir Tatlin ( 18885-1953 ). 러시아의 화가및 조각가. 광선주의의 영향아래서 추상미술을 시작했고, 러시아 예술을 이끈 구축주의를 전개했다.

                      <여자 모델> 1913, 트레티야코프미술관.

당시 타틀린은 종교화를 연구했으며 기법적으로는 입체주의의 면분활을 적극 시도했다. 이 누드화의 구도는 성모 마리아의 앉은 자세를 참고한것이다.

                   < 회화적 부조> 1914, 파괴됨.

구축주의 개념을 시도한 타틀린의 초기작중 하나다. 액자가 있는 캔버스 작업이다보니 회화적인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은 면이 보인다.

                    <코너 역부조> 1915. 러시아 미술관.

이작품이 실내공간의 구석에 자리한것도 상당히 전략적이다. 본래 이자리는 러시아에서 집집마다 이콘화가 놓이는곳이다.

*이콘화로 그려진 미카엘 천사.동로마제국 시절부터 그려진 이콘화는 금속 장식을 많이 사용해 신비로운 느낌을 연출했다.

 

El Lissitzky ( 1890-1941 ) 러시아 구축주의 미술가로 유럽 주요 도시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러시아의 선구적 미술을 전파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프로운방> 1923. 반아베미술관.

1919년부터 리시츠키는 절대주의와 구축주의의 성과를 종합하여 3차원적인 공간 구성을 선보였고, 이를 건축 디자인에 접목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 프로운방 > 은 전시되자마자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러시아 미술의 혁신적인 미적감각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Sol Lewitte ( 1928-2007 ) 개념미술의 선구자. 지성에 입각한 개념적 미니멀리즘으로 이름을 알렸고, 개념미술이 지배적 사조가 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 모듈러 큐브> 1979. 베를린 구국립미술관.

네 개의 직육면체는 정확한 계산에 의해 만들어진것이다.내부 공간의 높이는 형대를 이루는 틀 두께의 정확히 8.5배다.르윗은 자신의 작퓸이 딱딱하게 보일수록, 산업적으로 보일수록 만족했다고 한다.

 

Yves Klein( 1928-1962 )신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전위예술가. 'IKB'라는 짙은 파란색에 대한 특허를 주장했으며,대중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작품으로 인기를 얻었다.

                    <텅빔> 1958년 클랭의 전시.

전시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진열장이 하나 있었지만, 그것 역시 텅 비어있었다.

                   <이브회화> 1954. 개인소장.

어설프기 짝이 없는 이 작품집은 클랭의 위트와 풍자를 엿볼수 있는 작품이다.그는 예술가로서의 데뷔를 타인에 의해서가 아닌, 자기 스스로 해버렸다.

                   <IKB 3>1960. 조르주 퐁피두센터.

화가가 특정색을 자기것으로 주장할수 있을까 ? 클랭은 다양한 색으로 모노크롬작업을 했으나 점차 울트라마린 계열의 파란색을 자신을 상징하는 색으로 생각하게 되었다.전문가와 함께 건조한 느낌의 그윽하고 진한 청색 안료배합법을 완성한 그는 특허를 출원하는데, 실제 특허까지 얻지는 못했고, 다만 개발일자를 등록시킬수 있었다. 이후 자신의 이름을 넣어 '인터내셔널 클랭 블루”라고 명명하고 늘 이색으로 작업했다.

                   < 인체측정> 1960년 파리의 갤러리에서 진행.

많은 관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현악연주가 이어졌고, 정장을 입은 클랭이 공연을 진행했다.앞에서 페인트통을 들고 걸어가는 모델이 클랭의 연인인 로트로 우에커로, 이 퍼포먼스의 실질적 리더였다.

 

Arman (1928-2005)

                 <꽉 참> 1960, 이리스 클레르 갤러리. 클랭의 <텅빔> 에 대한 아르망의 응답은 <꽉참> 이었다.

 

Allan kaprow( 1927-2006 ) 행위예술의 전신인 해프닝의 장시자. 플록의 액션페인팅과 케이지의 전위음악을 접목해 새로운 예술을 선보였다.

                 < 야드> 1961, 마사 잭슨갤러리.

그간 야외에서 타이어를 쌓던 카프로가 실내 공간에서 최초로 타이어를 던져서 쌓아 올렸다.카프로 뒤에서 놀고있는 꼬마는 그의 아들이다.

                 <달콤한 벽> 1970.

베를린장벽을 풍자한 이 해프닝 공연으로 카프로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콘크리트 블록사이에 빵과 잼이 짓눌린 것도 대단한 상징적이었다.

 

John Cage ( 1912-1992 ) 미국의 전위음악가. 플럭서스 활동을 했으며 예술의 근본을 뒤집는 발상으로 당대 예술가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 4분 33 초> 피아노연주를 위한 악보이지만, 음표는 전혀없다.

이것은 1악장의 악보이며, 전체는 3악장으로 되어있다. 게이지가 의도한것은 침묵도 음악이 된다는걸 보여주는것이었다.

                     < 재회> 1968. 토론토 라이어슨 극장.

테이블 왼쪽이 케이지이고 오른쪽이 뒤샹이다. 가운데 앉은 여인은 뒤샹의 두번째 아내이자 역시 체스광인 티니다.티니는 당시 뒤샹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그를 돌보기 위해 공연장에 함께 배석했다.뒤샹은 이공연이 있고 반년 뒤 세상을 떠났다.

 

Piero Manzoni ( 1933-1963 )

                        <예술가의 똥> 1961.

단단히 밀봉된 캔의 윗면엔 작가의 서명과 일련번호가 찍혀있다. 측면에는 유럽의 네개의 언어로 내용물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다.

 

John Baldessari ( 1931-2020 ). 미국 개념미술의 대부.개념미술의 가능성을 다각도로 실험했으며 여러 대학에서 많은 제자들을 성공적으로 길러냈다.

                           <의뢰받은 그림들> 1969.

발데사리가 끝이 뾰족한 물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그는 이처럼 특정물건을 가리킨 사진을 여러장 활영한뒤, 여러 화가들에게 똑같이 그려달라고 나눠주었고 이를 모아 전시했다. 이 프로젝트는 그가 개념미술에 전념한 이래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리본커팅, 휠체어에 앉은 남자, 그림들>(v.2)1988.개인소장 '점 시리즈'의 데표작이다.

 

에드워드 킨홀즈,

                                  <비전쟁 기념비> 1970, 휘트니 미술관.

자신의 아상블라주 작품을 글로 설명한것으로 실물로 만들어진 몇 안 되는 개념 타블로 중 하나다.

 

Joseph Beuys ( 1921-1986 ) 독일의 행위예술가이자 설치 예술가. 플렉서스 일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했으며, 사회 참여적 개념미술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무리> 1969. 노이에 갈레리에 전시.

이 작품은 기계문명과 자연을 대비시키고 있다. 미니밴은 앞으로 가려는데, 썰매들은 모두 뒤로 달린다. 환경과 생명을 지키려면 앞만 보고 달려서는 안 된다고 의미를 담았다.

                          < 어떻게 죽은 토끼에게 작품을 설명할까> 1965. 뒤셀도르프 슈멜라 갤러리.

이 공연은 보이스의 샤먼으로서의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보여준것으로 평가된다. 머리에 꿀을 잔뜩바른후 그 위에 금박을 붙였는데, 금박의 가격만 당시 돈으로 200마르크의 거금이었다고 한다. 그는 세 시간에 걸쳐 그야말로 신 내린듯한 모습으로 공연에 몰두했다.

                         <나는 미국을 사랑한다, 미국도 나를 사랑한다>1974. 르네 블록 갤러리.

코요테가 보이스에게 달려들어 펠트 담요를 물어 찢으려 하고 있는데, 보이스는 그저 자신의 자리를 지킨 채 버티고 서 있다.

                          <7천 그루 떡갈나무> 1982년 카셀 도쿠멘타 개막식에서 보이스는 이작품의 첫번째나무를 심었다.

그후 40년의 세월이 흐른뒤 카셀은 참으로 푸르른 도시가 되었다. 나무 옆에 서 있는 현무암은 이것이 보이스의 저각작품임을 말해준다. 이것은 사회적 조각의 가장 완벽한 예다. 카셀은 도쿠멘타의 도시이자 요제프 보이스의 도시다. 지금도 떡갈나무를 심고 그옆에 현무암 비석을 세우는 작업이 계속 이어지는 중이다. 물론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서. 이는 이도시를 더 아름다운 조각으로 만드는 일이자, 전쟁중 잿더미로 변해 버렸던 이 도시에 다시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어준 한 예술가의 꿈이 저 대지로 계속 퍼져나가게 하는 일이다.

 

 

Robert Smithson ( 1938-1973 ) 대지예술의 창시자.미니멀리즘 예술가들과 교류 했으며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선보였으나 비행기사고로 사망했다.

                 < 반쯤 흙으로 덮인 장작 헛간> 1970, 켄트주립대학.

50년전의 모습은 찾을길이 없다. 예상보다 빨리 폐허가 되었지만 어차피 시간과 소멸은 계속되는것이다. 다시 50년이 지나면 어떻게 될까 ?

                <소용돌이 방파제 > 1970. 그레이트솔트호.

24시간 개방된 이곳에는 작품보존을 위한 엄격한 규칙이 있다. 돌이나 흙을 반출해서는 안 되며, 자라난 잡초들을 뽑거나 밟아서도 안된다. 취사가 금지되며 쓰레기는 모두 수거해서 돌아가야 한다. 이를 어길시 막대한 벌금이 부과된다,

 

Walter de maria( 1935-2013 ) 대지예술의 선구자. 미니멀리즘을 거쳐 개념미술에서도 활약했으며 깊은성찰을 담은 작품들을 다수 발표했다.

                 <수직 지구 킬로미터> 1977, 독일 카셀 프리드리히 광장,

위에서 내려다보면 특정위치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거리를 재는 표지석 금속판처럼 생겼다. 놋쇠봉은 모두 단단히 결합된 상태로 땅에 박혀있다.

                <부러진 킬로미터> 1979. 뉴욕 디아예술재단.

<수직 지구 킬로미터>의 짝이되는 작품으로 원작에서 사용된 놋쇠봉과 동일한 2미터 길이의 봉 500개를 100개씩 늘어 두었다. 상상만으로 가늠해야 햇던 길이를 시각적으로 재현한것이다.

               <번개 치는 들판> 뉴멕시코주 사막 고원지대.

사방으로 사람들의 거주지에서 최소 6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설치되었다. 이 작품은 실제 벼락이 내릴때에야 비로소 완성된다.하지만, 이 완성된 모습을 만나보는것은 일생일대의 행운이다.

 

Nancy Holt( 1938-2014 ) 공공조각 및 설치 예술가. 로버트 스미스슨의 아내이자 동료로서 대지예술을 이끌었으먀 미국의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여성 예술가이다.

                    <태양 터널>1976. 유타주 사막에 설치된 이작품은 홀트의 대표작이다.

해가 지면서 만들어 내는 빛의 효과로 유명하다. 홀트는 스미스슨과 10년을 함께한 아내이자 가장 신뢰하는 동료였다. 그가 죽은뒤 홀트는 남편의 유작들을 완성하고 그의 미술을 계승했다.

 

Marina Abramovice ( 1946- ). 세르비아 출신의 행위예술계의 대모. 고통과 죽음을 극복하는 퍼포먼스와 울라이와의 공동작업으로 유명해졌다.

                             <예술가가 자리에 있다>. 2010, 뉴욕 현대미술관 회고전 모습.

공연이 길어지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조금은 이상한곳에 집중되었다. 마리나는 미술관 개장 시간부터 폐장 시간까지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는데 아떻게 화장실도 가지않고 그대로 있을 수 있냐는 것이었다.이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공연 중 마리나 앞에 앉은 울라이는 세월이 해준 분장을 그대로 한채 찾아왔다.

 

Ulay, Frank Uwe Laysiepen( 1943-2020 ).'울라이' 라는 예명으로 활동한 행위예술가. 본명은 '프랭크 우베 라이지펜'이다. 마리아 아브라모비치와 'The Others'를 결성해 벌린 퍼포먼스로 널리 알려졌다.

                       

                               <연인들> 1988년, 산시성,위린의 선무현, 네이멍구 자치구 경계에 가까운곳이다.

마리나가 붉은 상의를 입고 지팡이에 의지해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데 저 앞에서 파란 상의를 입은 울라이가 걸어 내려오고있다. 서로를 끌어안고 둘이 이야기를 나눈 시간은 잠깐이었다. 울라이는 사막의 별빛을 바라보며 그녀와 다시 시작할 수 잇겟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마리나는 험준한 산을 넘고 또 넘으며 그를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인생은 어차피 혼자가 아니냐며, 울라이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둘은 영영 이별했다.

 

데미안 허스트

                          <믿을 수 없는 난파선에서 건진 보물전> 2017. 베네치아에서 비엔날레기간중에 대규모 전시를 했다.

바다에 가라앉은 고대의 보물선에서 엄청난 유물을 발견햇다는 것이다. 잠수부를 동원해 찾아낸 고대의 조각들은 수백점에 이르렀는데, 하나같이 기괴한 모습의 대단한 보물이었다. 그런데 제목부터 이상하다. 실은 이 모든 작업이 쇼였다. 바다에서 건진 유물들도 다 미리 만들어서 바다에 빠뜨려둔 것이었는데, 모두 조각가와 고고학자에게 의뢰해 만든것이었다. 허스트는 희대의 사기꾼일까? 그렇지 않다. 그는 일부러 이것이 쇼임을 밝혔는데도, 전시가 끝나고 이어진 경매에서 단 한점도 남김없이 다 팔려 나갔다. 그는 사기꾼이 아니라 가장 앞서가는 기획자-예술가이고, 뒤샹의 진정한 계승자다.

 

Charlotte Moorman ( 1933 – 1991 ) 뉴욕 전위예술을 대표하는 첼리스트. 플럭서스 그룹에서 활동했으며, 백남준과의 공연으로 전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 TV 첼로와 비디오테이프를 위한 협주곡> 1971.

무어맨은 세간의 보수적 편견과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뉴욕 전위예술의 전사였다.

                  <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공연도중 사복경찰들에 의해 무어맨이 연행되고있다. 그녀는 상의를 벗은 상태였다.

                  < 굿모닝 미스터 오웰> 에 출연한 무어맨.

그녀는 이 무렵 이미 오래전부터 앓던 암으로 투병중이었으나 여전히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뱅크시는 우리시대의 신비로운 예술가 중 한사람이다. 그는 아무도 없는 새벽에 기습적으로 벽화를 남겨놓고 사라진다. 종이를 대고 스프레이를 뿌려 재빨리 완성하는 스텐실기법을 사용하기에 그는 지금껏 들키지 않고 전 세계 곳곳에 작품을 남길수 있었다. 홍길동처럼 신출귀몰하며 전세계를 누비는 뱅크시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유목민이다. 그의 작품이 사랑받는 이유는 탁월한 위트와 깊은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뱅크시는 낙서처럼 그려진 벽화의 가치와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다. 벽을 단색으로 칠해버리려는 인부에게 낙서로 그려진 친구가 살려달라며 애타게 설득중이다. 그런데 낙서를 지우려는 인부 역시 몰래 그려진 그림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