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다니던 직장을 10년만 다니고 그만두자고 마음먹고 있었다.
한국의 직장생활이 내 성격과는 맞지가 않았다. 자유스럽지는 않더라도 솔직하게 미팅이나 회의를 할수없는 한국조직의 관행이 그렇고...그안에서 자신의 잇속을 챙기고, 줄 잘서고 나대는 유능한 사람들의 틈속에서 사는것도 지겹기도 했다.
직장생활이 10여년이 다 되어갈즈음 아이엠에프로 조기명퇴할사람을 모집하는 내용을 보고, 이떄다 싶어서 고민하지 않고 지원했다.
한국에서의 게이생활에서도 별로 희망이 없었다.
내가 학교를 다니는동안 내가 보통 친구들과는 많이 다르다는것을 알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랐었는데......직장생활을 시작한즈음, 친구를 만나기로한 종로에서 시간을 죽이러 들어간 파고다극장에서 알게되었다. 술,담배를 못하는 사람은 장애인이나 다름없는 사회에서 살고있는 나는 그곳을 통해서 내 스스로 내가 가지고 있었던 잠재된 의문점, 그것은 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랬었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미팅을 나가는거에 관심이 없었고, 자위행위를 할때도 늘 남자선생님이나 양복입은 신사들의 모습들만 어른거렸었다.
극장에서 하이텔소모임 "또하나의 사랑" 이라는 동성애자 인권모임 소식지를 받아들고는 본격적으로 동성애자 세상으로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동안 혼자 고민을 하며 지냈는데, 하이텔 또사모( 또하나의 사랑 모임 ) 를 통해서 나와 같은 입장의 사람들이 많다는것을 알았고, 그모임의 컨텐츠를 읽어보고는 동성애자로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을 계기로 극장을 알고난후부터 고민으로 보낸 2년여 후에, 나는 비로소 동성애자로 사는것이 내 인생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결론을 얻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지않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거짓말 하며 살고싶지 않았고, 내 인생을 그런 사회의 구속이나 관념에 같혀서 허비하고 싶지않았다. 나는 내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게이로 살자고 했지만, 그렇다고 갈등이 없는것은 아니었다. 게이바를 가든 술집을 가든,,,,한국에서 게이라는 것은 그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모여드는장소가 있고, 여전히 사회에서 햇볕을 쬐지못하는집단이라서 말하자면 그안에서 좋아하고 사랑하며, 인생을 함께 할 사람을 찾는다는것은 내게는 낙타로 바늘구멍을 통과하기같았다. 술,담배를 못하는 나로서는 술마시는것으로 시작하는 대부분의 한국남성들의 사교생활에서 좋은반응을 얻기가 힘들고, 나는 내나이또래나 좀더 연상의 남자들을 좋아하는편인데... 나는 이미 늦은 나이에 게이 생활을 시작한경우라서 내가 찾고자 하는 사람을 찾기는 굉장히 힘들었다. 그런시도를 않해본건 아니지만, 그런경우에는 돈을 빌려달라고 해서 돈을 떼먹는 사람이거나 갈곳없고 능력없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결혼해서 가정을 두고 살면서 밤에만 게이바로 전전하는 사람들같은 부류들이거나.....이유는 다르지만, 내가 평생을 같이 살고싶은 사람은 만나기 힘들었다.
그래서 내가선택한 게이인생을 이런 희망도 없는 한국에서 보내기에는 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들어왓던 게이도시중에 카나다를 선택해서 독립이민을 신청했다. 독립이민자는 카나다사회에서 필요한 기술이나 경력으로 이민을 신청하는것이다. 그당시는 아이엠에프로 많은 사람들이 이 기회에 다른나라로 이주를 생각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아무튼, 혼자 독립이민 서류를 카나다 정부 웹사이트에서 자료를 다운로드 받기도 하고, 인터넷으로 이민을 신청한 사람들의 경험을 수집해서 서류를 혼자 작성해서 카나다 독립이민을 신청했다. 그당시 필리핀 카나다 대사관으로 보낸 이민서류가 거의 2년이나 걸렸다 많은사람들이 지원해서 업무가 폭주하기도 했고, 카나디언들이 일하는게 매우 느리기도 하다. 지금은 서울의 카나다 대사관에서 이민서류 담당부서가 있어서 1년 이내에 모든처리가 끝난다고 들었다.
아무튼 그당시 어머님이 길거리에서 한번 쓰러지신후 중풍으로 고생하시던떄라 영주권비자를 받고서도 유효기한 1년을 거의 다 채워서 큰 준비도 없이 대충 2002년 2월 24일에 토론토에 랜딩을 했다. 토론토에서 나의 대학친구집에 몇달을 머물렀다, 그친구는 내가 이민신청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 나중에 신청을했는데, 나보다 일년먼저 토론토로 들어와있었다. 나는 나혼자 카나디언 게이룸메이틀의 방을 얻어서 살고싶었지만, 이 친구의 사정상 내가 그집에서 룸을 얻어서 쓰야만 했었다.
그동안 노바스코샤에서 2년정도를 조라는 친구와 살았었는데, 서로 맞지않아서 나는 토론토로에 2005년 여름에 돌아왔다. 그리고는 토론토에서 www. Silverdaddies.com 을 통해서 피터를 만나서 8개월간의 데이트를 한후에, 내가 시민권을 받은날, 2006년 3월 23일 피터가 자기집으로 이사들어오라고해서 같이 살게 되었다. 그리고 2009년 9월 12일 나는 피터와 결혼을 했다.
그동안 게이로서의 나의 인생에 대한 밑그림들을 그려왔던일들이 이제는 이루어져 버린것이 되었다.
나의 인생은 내가 선택하는것이고, 내가 행복하게 사는것이 최선의 선택이어야 하고,
내가 꿈을 꾸며, 그방향으로 더디더라고 지속적으로 가고 있다면, 그것은 언젠가는 내가 가질수 있는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 게이라는 성 정체성으로 인해서 , 자신의 인생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희망없이 살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면,
나는 그들에게 인생의 그림들을 만들고, 계획을 만들어놓고, 그런 인생으로 가기위해 노력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게이이든, 아니든....우리 모두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태어난것이고,
그 행복은 다른사람들이 만들어주는것이 아니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만들어가는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추가로 업데이트( 2021년 6월) 를 한다면, 지난 2017년 10월17일에 피터로부터 이혼하자는 이메일을 받았고, 그후로 헤어지는 절차를 시작앴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혼자 살집을 구하고 2017년 11월15일부터 혼자사는 생활을 시작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2018년 1월에 변호사 사무실에가서 이혼소송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렇게 시작된 이혼소송은 당사자 합의에 실패헤서, 법원에서 조정신청을 해서 당사자 조정과정을 거쳐서 최종합의를 끌어낸것이 2019년 8월경이고 서류상으로는 9월경에 이루어졌다. 그때부터 변호사가 최종합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법원에 이혼신청서류를 제출했는데, 2020년 3월17일 발생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법원의 모든일정이 중단되고....그래서 2021년 1월7일에 법원에서 최종 이혼확정판결을 받았다. 그래서 법적인 이혼효력은 한달뒤인 2021년 2월7일부터 완전한 싱글로 다시 돌아왔다.
피터와 헤어진후, 2019년 6월8일에 현재 데이트중인 내남자를 만나서, 지금까지 꾸준하게 교제를 해오고 있다. 내남자 미셀과는 서로 남아있는 인생을 함께 할 사람으로 생각하고, 코로나 사태의 상황으로 인해서, 동거를 할수있는 시간을 많이 갖고 있고, 향후의 상황에 따라서 우리의 발전된 관계를 만들어가는 결정을 하게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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